경험 공유

호주 이민 Part 15: 브리즈번 정착기

Archer Ji 2022. 4. 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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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sbane 시내 Hungry Jacks, 12년 전과 동일하다..
Brisbane city hall 전경

글쓴이는 2007년 11월 군 전역 후부터 2008년 10월까지 약 1년간 브리즈번에서 학생비자로 어학연수를 온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호주라는 나라에 살 생각조차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곳에 다시 살기 위해 돌아온 여정들을 뒤돌아보면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2007년 당시만 해도 Eightmile plains라는 동네가 Zone 4였는데, 위험한 동네라는 인식도 있었던 터라, 1년 가까이 생활을 하면서도 에잇 마일이나 써니 뱅크 부근은 가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어서 에잇 마일, 써니 뱅크 집값이 1 million은 거뜬히 넘으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 당시 가든시티 바로 옆 Macgregor 2층 집 시세가 50만 불에서 왔다 갔다 하였으니 말 다한 거다.

아무튼 한인이 많이 거주하고 쇼핑이 편리한 곳을 검색하다 보니 써니 뱅크, 써니 뱅크 힐스, 런콘, 칼람 베일 등지로 거주지가 좁혀졌다. 애초에 브리즈번 북쪽을 고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남쪽에 비하여 교통도 불편하고 한인 마트도 많이 없어 남쪽 지역 Suburb들로 렌트를 구하기 위해 인스펙션을 다녔다. 남쪽 지역이 범죄율이 높고 좀도둑들도 많다는 인터넷 글들을 많이 봐서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범죄율이라는 게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높아지므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그 자체로 위험한 동네들도 있으니 그런 동네들은 삼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Inala(이날라)라는 동네가 있는데 베트남 깡패들도 많이 활동하고, 흑인이나 무슬림 쪽 사람들이 많은 거주하는 동네로 동네 분위기 자체가 음산하고 쇼핑센터를 다니다 보면 절도로 인해서 깨져있는 유리문이나 유리창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Runcorn 역시 무슬림이나 인도 지역 분들이 많은데 이웃으로 지내기엔 다소 많이 시끄럽고 괴로우니, 이웃들의 상태도 체크해가며 집을 구하는 것이 향후 정신건강에 이롭다. 또한 런컨 일부 지역은 산악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신호가 매우 열악하니, 전화통화를 자주 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아무튼 글쓴이는 Rent를 Runcorn(런콘) 지역으로 구했는데, 전화 신호가 약하고, 시끄러운 이웃을 만나서 2년 동안 매우 고생했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정착 관련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가 보겠다.

Rent fee가 시드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청 저렴했었기 때문에 행복했지만 비싼데 이유 있고, 저렴한 거에 이유 있듯이 저렴하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시기 쯔음 절실하게 느낀다. 아무튼 Rent를 손쉽게 계약한 후 와이프 Day care 사업 준비와 더불어 나의 개인 사업도 준비하기 시작한다. 사업을 사고파는 Agent를 통해 요식업 사업 인수를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수익이 좋지 못한 곳이 많았고 마음에 드는 매물이 없어서 큰 진전은 없었다. 그쯔음 썬 브리즈번이라는 브리즈번 한인 정보 공유 사이트를 통해 괜찮은 직장이 있는지 물색을 하던 중 Area Manager를 찾고 있던 고용주가 있어서 지원해보게 된다. 감사하게도 고용주는 나의 이력을 마음에 들어 하셨고, 그렇게 그 회사를 위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회사의 중대 결정은 고용주, Operations Manager, Area Manager(글쓴이) 이렇게 셋이서 주로 결정하였는데 추후 Covid-19 판데믹의 영향으로 Operations Manager는 그만두고 나와 고용주가 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직책이 Area Manager이지 회사 운영자로서의 모든 업무를 다하고 있었으니, 고용주 대신 글쓴이가 회사를 운영했다고 보면 되겠다.

Retail industry에서는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일하는데 크게 다를 점은 없을뿐더러 공통점도 많았기 때문에 한국 직장 다닐 때 갈고닦았던 엑셀 스킬과 마케팅, CRM, 머천다이징 스킬 등등을 총동원하여 Start up회사를 키워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처음 입사했을 당시에는 인수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회사 자료나 직원 교육 등 부족한 점등이 많아서 집에서도 시키지 않은 업무를 하는 등 열정을 다해서 일을 진행해 나갔다. 이때 취업으로 인해서 개인 요식업 사업 관련 일들은 중지하게 된다. 비록 회사 연봉이 기대치에 못 미치고, 회사 업무 환경도 많이 열악했지만 호주에서 사업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고용주의 비전, 그리고 회사를 키움으로써 나 자신도 함께 커나가기 바랬던 소망등으로 회사에 헌신하며 일을 해나갔다. 하지만 고용주와 Management team에서 밀접하게 근무하다 보니 기존에는 못 보았던 안 좋은 점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을 잘 못 지킨다거나, 회사 관련 프로젝트를 하루가 다르게 계속 변경해가며 업무에 차질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행동 없이 말로만 반지르르하게 하는 고용주의 행동에 대해 실망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겐 좋은 분이셨고 감사한 분이셨으나, 글쓴이와 결이 다른 분이셨기 때문에 종종 업무상 마찰도 발생하곤 했다. 고용주는 통이 크시고 돈이 많은 분이셨지만 공정하게 사업을 운영하는 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조그마한 회사 규모와는 다르게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서 따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Covid-19로 회사가 힘들어지자 임대비를 고의적으로 미납하고, 추후에는 Liquidation(청산)을 함으로써 그 큰 금액을 지불하지 않고 피해 가는 방법을 보고 있자니, 정직하게 꼬박꼬박 임대비를 내며 사업하는 사람들이 어찌 보면 미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나 같았으면 임대비를 최대한 꼬박꼬박 냈을 텐데, 저런 방법도 있음을 배운 나는 나름 허탈하면서도 편법을 배울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고용주의 방법이 맞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고용주의 언행불일치로 인하여 불신이 가득 차 올라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극에 치닫던 때에 감사하게도 고용주가 회사 사정을 핑계로 투자자 겸 동업자를 영입하게 되었다며 나의 업무가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넌지시 인폼 하여준다.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올해말까지는 함께 버텨달라며, 힘든 시기임에도 2년만에 처음으로 연봉 인상까지 약속해주셨던 분이 하루아침에 또 돌변한 것이다. 어차피 집만 구매하면 그만둘 궁리를 하고 있었던 시기였던 터라 글쓴이는 시원하게 알았다고 말한 후 정해진 기일까지 출근을 완료하였다. 기존에도 수차례 그만두겠다고 고용주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회사의 재정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순수히 나의 주급을 아껴서라도 회사를 잘 이끌어 달라는 조언조의 요청이었으나 그때마다 고용주께서는 나의 업무능력이 필요하니 자금 걱정은 마시고 그만큼 열심히 해달라며 글쓴이를 붙잡아주시길래 그렇게 잔류를 하곤 했다.

Covid-19가 창궐한 시점부터 2년이 지난 최근까지 버텼으니 잘 버텼던 것 같기는 하지만 이뤄낸 것이 없어 개인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적자 운영을하신 고용주께 죄송스러운 마음이든다. 이번 직책은 나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하고자 했을 때, 처음으로 목표 달성을 못한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남겨지게 됐다. 인터넷의 발달로 Retail(소매)업계는 향후에도 많은 도전 과제에 직면할 것이라는게 글쓴이의 견해이다. 사업하기에 워낙 시기가 좋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글쓴이는 이번 일을 계기로 과거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의 성향을 빗대어 볼 때, 나는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기 쉽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만약 내가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선임이 있을 때는 그 분위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올바르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본인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동양이건 서양이건 비록 부하직원이 직장상사보다 일도 잘하고 잘났더라도 그 부하직원은 직장상사를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이기려고 노력하는 순간 잡음이 생길 것이고, 그 상사는 그 방법이 옳든 그르든 어떻게든 간에 그 부하직원을 깨부술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말없이 전달된다. 내가 당사자에게 말을 하지 안더라도 그 당사자는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소리 없이 퍼지는 감정을 들키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나의 시대에서는 통념이고 원칙이었다. 싫어도 좋은 척, 좋아도 싫은 척. 획일적인 인간관계에 지치고 힘든 마음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내 회사를 만드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한국에 있을 때 회사를 그만둘 때에도 이민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보다도 나의 철학으로 운영할 수 있는 내 사업을 하고 싶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하던 중 불안한 마음에 한 대기업에 지원하게 된다. 회사 이름은 Philip Morris International, Territory Manager직책을 고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글쓴이가 근무했던 회사에 같은 직책으로 그대로 지원했던 셈이다. 일단 HR 담당자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서류 전형 합격 후 간단한 전화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전화 인터뷰 합격 후 대면 면접을 진행하였다. 대면 면접을 나쁘지 않게 마무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듣기에는 다소 서투른 듯 들리는 나의 영어실력이 발목을 붙잡은 듯 싶었다. 분석을 해보니 내가 불합격할 이유는 영어가 가장 큰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된다. 겉으로는 Diversity(다양성)를 중시한다고 호주 정부건 이름 있는 회사들이건 모두 내세우고 있지만 그 다양성도 완벽한 영어를 바탕에 두고 있는 지원자의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글쓴이 역시, 직원들을 채용할 때 영어에 서툰 지원자들은 채용을 안 하려고 했었으니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이민 1세대의 어려움은 아무래도 Language Barrier(언어장벽)가 가장 클 것이다. 나는 넘기 힘든 그 장벽을 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안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일말의 가능성도 없음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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